자연과함께 어울리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1)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고대 인류는 자신들의 삶과 가족 공동체를 위한 주거 시설로서 처음에는 동굴에 살거나 간단한 원형 음집을 지어서 살아 왔다. 구석기시대를 거처 공동체 구성원이 늘어나고 주거시설의 용도가 다양한 기능이 필요한 것과 자연재해 및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견고한 주거 시설이 필요해짐으로서 나무와 흙을 이용한 튼튼한 움집이나 음식물의 저장소를 지어 살았다. 가장 간단한 목조건축으로서의 움집은 평지위에 둥글게 깊지않은 움을파고 둘레에 나무 기둥을 안쪽으로 기울도록 세워서 기둥 머리들이 서로 모이게 한 다음 둘레에 볏짚이나 나뭇가지 등으로 이엉을 만들어 덮어서 바람이나 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주거지이다. 신석기의 청동기시대를 거처 철기시대에 들어와서 주거지의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함에따라 최소 사각형의 주거지의 4개 모서리에 땅을 파서 굵은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를 서로 횡재(橫材)로 연결하여 움직이지 않게 집의 골격을 구성하고 그 위에 팔(八)자형의 용마루가 있는 맞배지붕을 올려 집의 전체 구조를 완성한다. 초기에는 팔(八)자 지붕 골격에 기다란 서까래 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그위에 볏짚 따위를 덮은 뒤에 흙을 얹어서 비가 새지 않도록 하였고, 벽은 수직으로 세운 기둥과 기둥 사이에, 통나무나 널판을 가로 질러 대어서 꾸몄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이후의 주거지 발굴을 통해 살펴 보면 움집은 규모가 커서 장방형의 한 면이 4~7m이고, 넓이는 50~60m에 이른 것도 있다. 서기전 7세기쯤의 것으로 추측되는 경기도 파주군 덕은면의 집자리 유적중에는 깊이가 40~90cm, 동서 15.7m, 남북 3.7m가 되는 것도 발견되었다. 움집의 기둥 구멍은 모두 수직을 이루며 기둥이 주저앉는 것을 막기 위해 주춧돌을 놓은 집도 있고, 칸을 막은 흔적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기도 하여 움집 내부의 공간 분활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움집의 중앙부에 있던 화덕이 어느 한 쪽으로 밀려나 두 개의 화덕을 갖춘 집도 있고 출입을 위한 층계나 비탈이 없는 경우도 많다. 당시의 주거지 군락을 보면 움집은 서너 집 내지 백여 호가 모여 마을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움집은 부족사회가 발전하고 부족장이나 왕들이 거거하고 업무를 볼 수 있는 커다란 공공건물의 필요로 견고한 목조건물이 생기게 되었다. 석기시대부터 발전한 움집은 농경시대의 볏짚과 진흙을 재료를 이용하여 건축된 우리나라의 초가집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상에 건축된 주거 중 우리나라의 기후와 자연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초가집이다. 초가집은 우리나라 산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소나무로 집의 기둥을 만들고 추수를 마친 벼의 짚으로 지붕을 만든후 진흙으로 두껍게 벽을 만들었으며 창호지 문을 설치한다. 초가집은 가벼운 볏짚 때문에 기둥에 거의 압력을 주지 않으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 녹아도 짚의 결을 따라 흘려내려 잘 새지 않는다. 볏짚은 가볍고 구명이 많아서 단열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다. 또한 벽에 바르는 진흙을 갤 때 짚이나 수수깡을 넣어서 바르기 때문에 진흙벽은 낮에는 태양열을 흠뻑 받아드린후 차가운 저녁에 실내로 열을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초가집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에너지 절약형 주택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우리 선조들이 석기시대부터 움집에서 초가집과 한옥으로 이어지는 주택에대한 자연 친화적인 높은 과학 기술을 터득한 지혜로운 민족임을 알 수 있다.
2022. 3. 6
운룡도서관 운룡역사문화포럼 이사장 이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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