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우리나라 고대과학 기술” (7) : 사찰 건물과 세계 최고층 황룡사 9층 목탑
목조건물 중에서 왕궁의 전각과 주택 다음으로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찰 건물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전진(前秦, 351∼394년)으로부터 전래되었고, 백제는 384년 중국 동진(東晋, 317∼420년)에서 들어 왔다. 〈해동고승전〉에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절은 372년 고구려의 평양에 세워진 초문사이다. 이후 이불란사가 건축되었고 광개토대왕 2년인 393년에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많은 사찰이 건축되었지만 화재 등으로 소실되고 남아있는 목조 건물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목조건물들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오래된 목조건물은 고려시대의 것들로써 남∙북한 합쳐 열 채 정도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건물중 건물의 창건 및 중수 기록인 상량문에 근거하면 봉정사 극락전이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알려지고 있으며 10년후 1376년 고려 우왕 2년에 중수한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고구려의 사찰중에서 절터(寺地)가 남아있는 것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평양 청암리사지(淸岩里寺地), 대동군 상오리사지, 평원군 원오리사지 등이 있다. 청암리사지는 1938년과 1939년에 발굴 조사되어 사찰의 규모와 가람배치(伽藍配置)를 알 수 있었다. 가람배치를 보면 절(사찰)의 크기와 어느정도 목조건물과 목탑의 규모 등을 알 수 있는데 청암리사지는 중앙의 팔각기단에 거대한 목탑을 세우고 주위에 금당(金堂) 또는 부속 건물을 두었으며 건물 주위에 회랑을 갖춘 매우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백제의 사찰은 부여 지방을 중심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일 탑식 가람배치인 금강사지(金剛寺地)와 특이한 가람배치를 갖고 있는 익산의 미륵사지 등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년~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당,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 이전에 미륵사지석탑이 벼락을 맞고 무너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화재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미륵사가 창건되던 7세기 초는 삼국의 영토 경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서 각국은 국력 신장 힘을 과시하기위해 거대 사찰의 건축을 경쟁하던 때였으며 미륵사도 이 시기에 건축된 백제의 대규모 국찰(國刹)이다. 1974년 미륵사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현존하는 서쪽편 석탑과 동탑지(東塔祉) 가운데 목탑 유구가 발굴되었으며 서탑은 동탑과 똑같은 높이와 구조를 갖춘 석탑임이 밝혀졌다. 미륵사는 백제사원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의 사찰로 마당에는 탑을 건립하였는데, 중앙에 있는 목탑이 가장 컸으며, 좌우에 있는 탑은 석탑으로 세웠는데 현재 서탑만 남아있는데 해체 복원중이고 동탑은 소실되었으나 복원되었있다. 일본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의 목조건물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로서 스이코천왕의 아들 쇼토쿠태자가 백제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601∼607년에 세웠다고 한다. 호류지의 목조건물은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1400년전 건축물이다. 백제 기술자들이 건축한 호류지의 건물들중 금당과 5층 목탑이 있는데 고구려 화가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는 금당은 최근에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5층 목탑과 부속 건물들 만 보존 되어 있다. 이 탑의 건축 양식이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형태와 구조가 매우 유사하여 눈으로 보아도 같은 축조기술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인들이 건축한 호류지(法隆寺)의 5층 목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지만 신라의 황룡사(黃龍寺) 9층 목탑과는 높이와 구조에 있어서 비교가 안되는 목조건물이다. 황룡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 터에 호국불사(護國佛寺)를 만드는 것이 나라에 더 좋을 것이라는 대신들의 의견에따라 사찰을 착공하고 황룡사라 하였다. 이렇게 착공된 황룡사는17년 후인 제27대 선덕여왕시대(569년)에 1차 완공되고 그후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친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황룡사지 발굴 결과에따르면 사찰의 전체 규모는 약 2만5000여 평에 달한다. 황룡사는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황룡사의 가람 배치에서의 중심은 9층 목탑이었다. 신라는 목조건축의 최고 기술자인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였으며 아비지는 목탑 기술자 200명을 거느리고 신라에와서 황룡사 목탑을 건축 하였다. 황룡사 목탑의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645년 전후하여 전 세계에서 건축된 고층 목조건물은 중국 불궁사 석가탑(67.3m)과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일본 법륭사 5층 목탑(31.9m)뿐인데 가장 높은 목조 건물을 건축한 것은 신라 황용사 목탑(79.2m)이다. 실제 황룡사 탑이 현존하지 않치만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중국과 일본의 목탑을 비교해보면 높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으며 신라가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을 지을수 있는 토목기술을 갖고있었고 판단된다.
이명우 2022. 2. 23
운룡도서관 운룡역사문화포럼 이사장 이명우 <저작권자 ⓒ 평생교육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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